대한민국 마지막 애국자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 (2024)

청암은 그러나 이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거기에다 회삿돈을 더 보태 임직원 자녀들을 위한 제철장학회를 세웠다.

이렇게 세운 학교만 포항과 광양에 모두 27개이다.

한국 기업 최초로 임직원 자녀 대상 전액 대학 장학금 제도와 한국 최초의 연구 중심대학(포항공대)은 이렇게 탄생했다.

국영기업 최고경영자(CEO)로 30여년 재임하는 동안, 청암에게는 고가(高價)의 설비 구매나 원료 도입 결정을 둘러싼 정치 자금 협조와 인사 청탁, 리베이트 요청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불법 뇌물인 정치 자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정치 무풍지대’를 고수했다.

이는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무한 신뢰에다가 청암의 ‘천하위공’ 정신이 어우러진 덕분이다.

청암이 현실과 적당히 타협했다면, 포항제철은 부실 회사로 추락하거나 적자를 걱정하는 2~3류 기업이 됐을 것이다.

1965년 한일(韓日) 국교 정상화를 하면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 일부로 세운 ‘국민 기업’이라는 칭호도 퇴색했을 게 분명하다,

장교 시절 당번병을 쓰지 않았던 청암은 통행금지를 지키다가 첫 아이를 잃었다.

그는 멸사봉공(滅私奉公)과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입으로만 외치지 않고 국제 가격보다 20~40% 저렴하게 양질의 철강 제품을 국내 기업들에 공급하면서 흑자 행진을 이어가는 ‘제철보국(製鐵報國) 경영’에 목숨 걸었다.

그는 회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는 “우리가 실패하면 조상에게 엄청난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 우향우(右向右)서 영일만 바다에 투신하자”고 외쳤다.

불굴의 정신력으로 그때마다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갔다.

1979년 박정희 서거후 청암은 “포항제철을 정치 외풍에서 지키기 위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놨다.

1990년 3당 합당 후 민정계의 수장(首長·최고위원)이 된 그는 김영삼 대통령 후보와의 불화로 1992년 말 민자당 최고위원·포항제철 회장·국회의원직에서 모두 물러났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다른 추도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너나 없이 돈에 홀려 정신 잃은 세상에서 박태준의 길을 따라가기란 너무 어렵고, 어쩌면 그 분은 이 시대에 마지막 애국자인지 모른다. (중략) 정직·청렴한 그 분을 바로 아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바르게 세우는 길이다.”

◇ 성숙한 일본관... 지일과 용일`극일(知日과 用日·克日)

청암이 남다른 세 번째 측면은 성숙한 대일(對日) 자세이다.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그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 두 개가 있다.

이야마 북중학교 1학년때 교내 수영대회에서 1등을 했지만 ‘조선인’이란 이유로 일본인 심판의 편파 판정으로 우승을 빼앗긴 일과 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도쿄 시내에 미군의 폭탄이 쏟아지던 날 방공호에서 겪은 일이다,

“그때 방공호는 질서가 정연했다. 노인들, 특히 할머니들이 나섰다.

‘젊은이는 안으로 들어가라. 위험한 곳은 우리가 막는다. 왜 책을 들고 오지 않았느냐?

젊은이는 책을 펴고 공부해라.’ 방공호 입구에 천막이 쳐지고 젊은이가 모인 제일 안쪽엔 두개의 촛불이 켜졌다."

청암은 “1등을 뺐겼을 때 가슴 속이 끓었지만 참고 다스렸다”며 “방공호에서 할머니의 질책을 들었을 땐 식민지 청년으로서 고국(故國)에 대한 책임감에 몸서리쳤다”고 했다.

그는 일본이 준 분노는 참고, 감동은 받아들여 조국 재건을 위한 동력으로 삼았다.

일본에 대한 그의 진면목(眞面目)은 포항제철 건설 자금 마련을 위한 협상에서 드러났다.

박정희 정부는 1965년부터 종합제철소 건설을 추진했고, 이듬해 11월 미국·영국·독일 등 5개국 8개 회사 연합체인 대한(對韓)국제제철차관단(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발족했다.

KISA는 그러나 1969년 상반기 “한국에서 종합제철소 건설은 채산성이 없다”며 ‘최종(最終) 불가(不可)’ 결론을 내리고 붕괴했다.

세계은행(IBRD)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제철소 건립 자금을 모을 방법이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 처지가 됐다.

여기서 청암은 ‘농림수산업 지원 용도’로 정해져 있는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을 포항제철 건설 자금으로 일부 전용(轉用)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자신이 ‘해결사’로 나섰다.

이 제안에 완강하게 반대하던 오히라 마사요시 대장상(大藏相·우리나라의 기획재정부 장관)을 1969년 8월 1주일 동안 세 차례 만났다.

청암은 일본 정부간행물 보관소를 찾아 샅샅이 뒤져 일본 사례를 분석한 뒤 “한국에 제철소를 지으면 일본 안보에 큰 도움된다”는 논리를 설파해 설득해 냈다.

전 세계가 하나같이 “한국에서 제철 산업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할 때, “난국에 빠진 조국을 구하겠다”는 청암의 순정하고 강렬한 애국심이 일본 지도층을 감복시킨 것이다.

그의 완벽한 일본어와 일본인의 문화적 특성과 심리를 꿰뚫는 실력도 이를 뒷받침했다.

당시 그를 만났던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는 “나는 박태준의 단호함에 너무 놀랐고, 그래서 당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감정적인 반일(反日) 데모가 끊이지 않던 1960~70년대, 청암은 “일본을 알고 일본을 활용해 일본을 극복하자”는 ‘지일(知日)·용일(用日)·극일(克日)’의 3단계 일본관을 주창했다.

청암은 포항제철의 ‘스승’이던 신일본제철을 1990년대 추월해 그 타당성을 증명해 냈다.

불굴의 용기와 투지로 청암이 이뤄낸 한·일(韓日)의 협력 모델은 대한민국의 진정한 산업화와 선진화를 추동시킨 출발점이었다.

현해탄(玄海灘·대한해협) 양쪽에 자유민주·시장경제라는 동일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국은 일본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고도성장을 질주한 것이다.

◇ “후세 경영자들에게 살아있는 교본”

1978년 중국의 덩샤오핑이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을 만나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하자, 요시히로 회장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이 일화는 박태준이 한국을 넘어 최소한 아시아적 인물임을 보여준것이다.

그가 세우고 이끈 포항제철은 그의 생전에 품질 경쟁력 세계 1위 철강사가 됐고, 양적으로도 1975년 세계 46위에서 3위(1989년), 1위(1997년)로급부상했다.

그가 없었다면, 한국 조선·자동차·기계·건설 산업의 성장과 대한민국의 세계 경제대국으로 도약은 한낱 ‘꿈’에 그쳤을지 모른다.

철강 불모지라는 ‘절대 절망’에 좌절하지 않고 ‘세계 1등’과 ‘초격차 경영’을 선구적으로 이뤄낸 박태준은 “후세의 경영자들을 위한 살아있는 교본”(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이다.

그는 1977년 8월 상당한 자금을 들여 공정률 80%에 달하던 건물의 부실(不實)을 발견하고 서슴없이 폭파 명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조국의 백년대계가 여기서 출발한다.

이것은 폭파가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기폭제다”라고 했다.

◇ “현장의 선비”...한국 리더들의 ‘롤 모델’

청암에게서 양보할수 없는 기준은 선조들의 핏값과 후손들의 미래라는 대의(大義)였다.

그렇기에 그는 어떠한 부실이나 부정(不正)·불의(不義)와 거래하거나 눈 감기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의 지적이다.

“한국의 저명 인사들은 모두 강당에서의 선비이고, 책 속의 선비, 말 속의 선비였다.

그러나 박태준은 지(志)와 의(義), 그리고 렴(廉)과 애(愛)를 행동으로 실천한 ‘현장의 선비’이다.”

세계 어느 나라 보다 돈에 대한 집착과 사익(私益) 추구가 심한 한국에서 청암은 국민의 사표(師表)이자, 리더들의 롤 모델(role model)일 수 있다.

그가 스스로 평생 붙잡아 온 4가지 화두를 보면 더 분명해진다.

①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② 절대 절망은 없다

③ 어느 분야든 세계 1등이되자

④ 10년 후를 내다보라

2023년 올해는 마침 청암이 이 땅을 떠난 지 12년, 우리나라 최초인 포항제철 고로(高爐·거대한 용광로)에서 쇳물을 처음 쏟아낸 지 반세기(半世紀)를 맞는 해이다.

위대한 애국자였든 청암의 혼을 애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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